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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 신학 기고글] 바울이 절망에 무릎 꿇을 수 없었던 이유: “소망” – 김형국 목사

작성자
하나복
작성일
2017-03-31 17:38
조회
1687

바울이 절망에 무릎 꿇을 수 없었던 이유: “소망”

김형국 대표목사 / 나들목교회 / 하나복DNA네트워크

지난 50년을 그저 슬쩍 훑어보기만 하여도, 이 나라의 백성과 교회는 힘겹고 고통스러운 세월 보내왔음을 알 수 있다. 50년대의 동족상잔의 비극, 60년대의 혼란과 군사독재의 시작, 70년대의 삼선 개헌과 유신, 80년대의 광주 민주화 운동, 90년대의 외환위기… 그리고 우리는 2000년대를 맞았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세상살이와 나라 전체가 점점 나아지는 면도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절망스러운 소식들을 들으면서 산다. 급증하는 깨어지는 가정의 아픔, 학교 교육의 붕괴에 따른 학부모의 혼동과 수험생들의 절망, 적잖은 사람에게 자살을 마지막 출구로 몰아대는 무책임한 신용카드사, 이런 저런 모양으로 소외된 이웃들의 슬픈 이야기, 나라와 백성 생각보다 정리 정략에 따라 이합집산과 이전투구를 거듭하는 정치인들, 국제 경쟁력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나라 전체를 부패 공화국으로 만드는 검은 돈과 이를 중심으로 한 정치권의 공방들, 남북의 갈등과 남남의 갈등에 이어진 세대간의 갈등, 주권 국가로서 자신의 소리를 내기에는 여전히 허약해 보이는 우리 정부… 한도 끝도 없는 문제들이 2000년대의 중반을 향해 걸어 들어가고 있는 우리 백성들의 어깨를 짓누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있는 우리 조국의 교회를 바라볼 때, 소망스런 마음보다는 절망스런 답답한 마음이 든다. 이제는 기독교를 삶의 대안으로 조차 여기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 교회를 떠나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유리하는 교인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교회의 본질로부터 자꾸만 멀어져 가는 우리 교회의 모습, ‘이 세대’의 가치가 부끄럼 없이 스며들어 버린 우리 교회의 모습과 그리스도인들의 삶. 그리고 기독교를 ‘개독교’라 부르는 무리들을 배태시켜낸, 수도 많고 종류도 많은 문제들…

우리 백성과 우리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부정적인 문제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긍정적인 부분들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고, 또 그러한 면들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를 절망에 무릎 꿇게 하려는 듯, 수많은 문제로 우리를 옥죄온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단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를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근거가 약한 낙관론’이나, 어쨌든 점점 나아질 것이라는 ‘근거가 없는 소망’으로 이러한 절망을 극복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이러한 시대상에 눈 돌리고 내 할 일만 열심히 하겠다는 ‘소시민적 성실주의’, 또한 설득력 있는 답변으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와 비슷한 세상을 살면서도, 절망에 무릎 꿇기보다는, 절망보다 더 강한 소망으로 삶의 경주를 완수하였던, 성경 속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사도 바울에게서 그의 비결을 들어본다.

절망의 시대, 고통스런 삶을 살았던 바울

먼저, 바울은 그 시대의 아들이었다.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서에 그려진 사도바울은 무엇보다도 유대인들로부터 끊임없는 박해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인 신념으로 인해 사도 바울에게 가해진 박해는 바울에게는 혹독한 것이었다. 자신의 생명을 대신해서라도 구원하기를 원했던 동족 유대인들의 박해는 그에게 단순한 육체적 고통을 넘어서는 그의 심령의 매인 바였다 (롬 9:1-3, 행 20:22-24). 이러한 유대인들의 박해는 많은 경우 정치권력과 연결되어 사도 바울을 고통스럽게 하였다 (행 22, 24장).때때로 당시의 정치권력에 의해서 생명을 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행 19, 21, 23장), 그는 고문과 투옥, 그리고 법정에 서는 일을 여러 번 겪어야만 했다.

바울 개인의 삶에 대하여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바울에게는 그를 늘 괴롭혔던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고후 12:7). 이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의 제안들이 있지만(그에게 있었던 심한 안질이거나 유대인들의 핍박일 것으로 많은 사람이 이해하기도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보다는 그것이 얼마나 그를 괴롭혔으며, 그것에서 그가 놓여나지 못하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육체적인 고통이 수반되는 이 ‘가시’보다도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는 깨달음이 그에게 있었다고 해서, 그 육체적인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뿐 만 아니라, 그가 다메섹에서 만나 주님께 자신의 삶을 드리고 난 이후에, 그가 단지 모든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로부터도 버림을 당했을 것은 분명하다. 당시의 랍비들이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 드물었고, 그가 결혼 생활에 대해 언급할 때 매우 실제적이라는 사실 (예를 들어 고전 7장)등이 그가 유대교에 속해 있을 때 결혼하였지만, 개종 후에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이혼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도 있다. 여하튼 그는 깨어진 가정 또는 가정이 없음으로 겪는 어려움도 겪어야 했다.

그 뿐인가? 그의 사역은 어떠했나? 바울은 서신서들을 통하여 그가 가지고 있는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하여 끊임없이 쓰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세웠던 교회들이 자신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은 교회에 대한 이상에 못 미치기 때문이었다. 모든 교회들이 문제를 가지고 있어서, 거의 대부분의 서신이 각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 쓰여졌고, 특히 고린도서 같은 경우는 수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방인 가운데도 없는” 모습(고전 5:1)으로 인해 치리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고전 5:5; 딤전 1:20)이 있을 때, 그의 심령은 어떠했을까? 그의 사역은, 오늘날 목회적 관점에서 볼 때, 그 당대에는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한 것 같았다. 그가 세운 교회들로부터 모은 연보를 가지고, 생명을 걸고 올라간 예루살렘에서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지를 받은 것 같지 않다 (행 21-24장에서 예루살렘 성에서 교회가 바울을 도왔다는 암시가 거의 없다). 그 사역 말미에 그가 키웠던 많은 사역자들이 그를 떠나는 외로움을 경험하기도 했는데 (딤후 1:15; 4:10), 이는 결코 ‘오늘날의 성공한 목회자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가 사역을 감당하면서 겪었던 어려움들을 나열한 “고난의 목록”(catalogs of afflictions: 롬 8:35; 고전 4:9-13; 고후 4:8-9; 6:4-5; 11:23-29; 12:10)은 그의 삶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그가 끊임없이 이야기했던, “영광과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하며(롬 8:17; 고후 4:17)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도 받아야” (행 14:22)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이 따르리라” (딤후 3:12)는 말씀은 결코 그에게 과장이 아닌 현실이었다.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세상 사람들이 속하여 있는 모든 만물들이 고통 가운데 신음하며 탄식한다고 보았다 (롬 8:22). 그리고 성령님으로 인해 양자된 우리들 까지도 몸의 구속을 기다리며 동일하게 신음하며 탄식한다고 고백한다 (롬 8:23). 바울은 이런 면에서, 세상에 대하여 매우 현실적이고 실존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해하고 그가 경험한 세상, 절망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한 세상이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바울이 절망에 무릎 꿇을 수 없었던 이유: “소망”

사도 바울이 절망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가진 “소망” 때문이었다. 절망을 이긴 이유가 “소망”이라고 답하는 것은 무의미한 말처럼 들릴 수 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소망이라는 단어를 그 내용과 근거에 집중해서 이해하기 보다는 ‘소망한다’는 행위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사랑’, ‘믿음’, ‘은혜’ 등 성경의 중요한 단어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이 사용하는 “소망”이라는 단어도 그 내용과 그 근거가 중요하다. 내용이 빠진 ‘소망한다’는 행위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 사도 바울은 무엇을 소망하였고, 왜 그렇게 하였는가?

1. 바울의 소망의 근거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소망의 배경이, 앞서 이야기한, 바울 자신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며 탄식하는 상태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이러한 상태의 근본 원인을 로마서 3:23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로부터의 소외, 즉 “죄”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가진 소망의 근거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죄”의 극복에 그 기초를 둔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건, 율법이 없는 헬라인이건 모든 인간이 죄인임을 선언하고(롬 3:9), 율법과 관계없이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소개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롬 3:22)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된 것이다 (롬 3:24). 이 놀라운 축복을 받는 것은 행함으로가 아니라, “믿음의 법으로”(27절), “믿음으로”(28절) 되는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이 믿음의 예를,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에게서 든다. 율법과 할례가 오기 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다” (롬 4:3)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의 요소 중에는 “소망”이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그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어”(롬 4:18), “약속하신 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롬 4:21).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어” (parV evlpi,da evpV evlpi,di evpi,steusen)를 원문에서 직역하면, “소망에 반하여도[=소망이 없는데도] 소망 안에서 믿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중요한 요소 중에서 소망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지를 보여준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다.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을 따라,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우리도(롬 5:2) 소망하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소망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표현(kaucw,meqa evpV evlpi,di th/j do,xhj tou/ qeou/)을 표준 새번역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합니다’(이탤릭은 첨가)로 번역했는데, 롬 4:18과 마찬가지로 “소망”의 중요성을 정당하게 드러내주는 번역이다. 즉, 우리의 믿음에는,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어느 날엔가 그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실 것이라는 소망이 포함되는 것이다. 이러한 소망을 갖게 되기 때문에, 현재의 삶 속에서 환난을 당하여도 우리가 좌절하지 않는다. “이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아니하는데”, “성령님의 확신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었기” 때문이다 (롬 5:5).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소망’을 견고하게 해주며, 우리의 ‘소망’은 우리를 의롭다 하신 이가 마지막 날에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시키실 것에 대한 ‘믿음’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2. 소망의 내용

사도 바울이 소망의 내용을 로마서에서 종말에 나타나게 될 “하나님의 영광” (5:2 8:17,18, 20)으로 표현하고 있다면, 이것을 그의 다른 서신서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의 소망의 중심에는 모든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자리 잡고 있음(살전 1:3,10; 고전 15:19)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단순하게 미래에 이루어질 사건 이상의 다면적인 신학적인 내용을 가진, 그야말로 “소망”의 대상이었다.

먼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어, 결국 종말에 드러나게 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들이 구원(살전 5:9;롬 5:9f)을 얻을 것을 소망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신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evlpi,da dikaiosu,nhj)을 기다리게”(갈 5:5) 된 것이다. 이미 우리를 의롭게 하셨지만 여전히 그 의가 온전히 드러날 날을 기다리고 있는 사도 바울을 발견한다.

이 때에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이며 (살전 4:13-18; 고전 15장 전체와 특히 19절), 우리는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신음하고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몸의 구속과 양자됨 (아들됨)을 얻을 것이다 (롬 8:23).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주는 것 중의 일부이다. 우리는 양자되었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특권을 누리고(롬 8:15; 갈 4:6), 예수님이 오실 때에는 예수님과 함께 영광스런 상속에 참여하게 된다 (딛 3:7; 롬 8:17; 엡 3:6).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참여하게 될 하나님의 영광의 날에 우리가 상속하게 되는 것 중에서 아마도 가장 귀중한 것이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하는 삶일 것이다 (살전 5:10). 이를 사도 바울은 디도서에서 ‘영생’ (딛 1:2; 3:7)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소망을 사도 바울은 디도서 2:13에서 간결하게 요약한다: “복스런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NIV가 채택한대로, “복스런 소망”과 “우리의 ….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은 동격으로 보는 것이 좋다 (th.n makari,an evlpi,da kai. evpifa,neian … VIhsou/ Cristou/). 바울에게 있어서 소망은 단지 소망하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는 것, 그것 자체였다.

3. 사도 바울의 역사의식

사도 바울은 그의 소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이 약속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루셨는지에 근간을 두고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악과 부조리를 메시야를 보내심으로써 완전히 해결하실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오심은 메시야의 시대가 시작되었음 뜻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재림으로 하나님 나라가 온전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이 땅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나라가 온전하게 드러날 것을 소망하며, 그 나라의 영광에 참여할 것을 기대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이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고 있는 시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우리가 얻은 구원을 과거에 일어난 일로만 국한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큰 틀 안에서 보고 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예수님의 재림과 그에 따른 여러 측면에서의 축복으로 완성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중간 시대에 버려지지 않았다. 우리 속에 주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고 (롬 5:5), 이 성령님은 우리가 구속을 입을 날까지 우리에게 “보증”이 되어 주신다 (고후 1:22, 5:5; 엡 1:13-14). 성령님은 우리에게 각 개인에게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갈 5:22-23), 종말론적인 공동체인 교회에는 다양한 은사를 허락하셔서, 마지막 때에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교회(엡 1:23)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신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그리고 이루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철저하게 뿌리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친족, 이스라엘의 구원의 문제를 “큰 근심과 마음에 끊이지 않는 고통”(롬 9:2)을 가지고 고민한다. 로마서 9-11장에 걸쳐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허다한 수가 돌아오고 있는 이 때에 유대인들이 오신 메시야를 배격하는 것에 대하여 신학적인 해설을 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에게 신실하셨던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결국은 회복하실 것인가는 너무도 중요한 주제였던 것이다. 바울은 각 개인과 그의 친족인 이스라엘까지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라는 맥락 속에서 보고 있다. 이러한 역사 의식이 바로 바울의 소망의 근거였고, 또한 내용이었다.

절망에 무릎 꿇지 않았던 바울의 삶의 특성

절망에 무릎 꿇을 수 없도록 바울을 붙잡아 준 “소망”은 그로 하여금 불굴의 삶을 살게 하였다. 그는 그와 동료 인간들이 겪어야 하는 고난에 대한 독특한 시각을 가지게 되었고, 여전히 부족한 교회에 대해서도 소망의 끈을 놓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의 사역은 늘 어려움을 동반했지만, 종말론적인 책임감과 확신을 가지고 이루어졌다.

1. 고난에 대한 이해

소망의 사도였던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겪고 있는 환난을 오히려 자랑한다고 표현한다 (롬 5:3). 왜냐하면 환난이 인내를 가져오고, 그 인내가 단련된 인격을 낳으며, 단련된 인격이 소망을 낳기 때문이다 (롬 5:4).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란다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롬 8:24-25). 마지막 날에 참여하게 될 영광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롬 12:12상반절), 사람은 환난 당할 때 참으며 꾸준히 기도할 수 있다 (롬 12:12하반절).

사도 바울은 실제로 자신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었는지 고린도 후서에서 여러 번 언급을 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고후 4:7-8) 이유는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하고” (고후 4:10),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 알”(고후 4:14)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그의 종말론적인 소망이 그로 하여금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견디게 한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잘 따른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에게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함께 “소망의 인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 표준 새번역)라는 매우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고난과 환난이 가득 찬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마지막 날까지 우리에게 보증이 되어주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신 것을 증언하시는 성령님께서(롬 8:16), 우리가 환난 가운데 참고 기다릴 때 (롬 8:25)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신다 (롬 8:26 상반절). 그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롬 8:26하반절).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로마서 8:15; 갈 5:16, 25)을 살라고 권고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롬 15:13)라고 기도한다.

2. 교회에 대한 소망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세우고 섬기는 교회들이 수많은 문제들이 있었지만, 그는 소망을 잃지 않고 교회를 세우기를 위해서 진력한다. 그토록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쓸 때에 그는 그들을 “고린도에 있는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고전 1:2, 이탤릭은 첨가)라고 부른다. 비록 지금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육신에 속하여 아직도 분쟁과 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고전 3:1-3) 있지만, 그는 그들을 이미 시작된 메시야의 나라의 시민으로 보았고 (엡 2:19; 빌 3:20), 그렇기 때문에 그 들 가운데서 그들을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교회가 미성숙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줄 때도 절망하지 않고 쉬임없이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속의 사역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자신이 피값으로 산 교회를 위해 일하고 계시는데, 그 사역은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워”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시는 것이다 (엡 5:27). 바울은 현재 교회의 부족함과 약함으로 좌절할 수도, 또한 그에 적당히 타협할 수도 없었다. 그를 부르신 주님께서 지금도 그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셨음”(엡 5:25)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이 마지막 때에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시다 (엡 1:23). 단순히 교회가 도덕적으로 순결해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렇게 온전해진 교회를 통하여 허무에 굴복하는 만물(로마서 8:20)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온전하게 회복하는 사명이 교회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이해하고 있다. 고린도 후서 11:2에 보면, 자신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고린도 교회)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 고백한다. 이 본문의 배경에 대한 다양한 제안들이 있지만, 그는 자신을 고대 유대의 풍습에 그려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여기에 그리고 있다. 딸을 약혼하게 하고 결혼 때까지 딸을 잘 보양하여 시집을 보내는 이미지를 그림으로써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 교회를 출산(고전 4:15; 비교: 갈 4:19)하였을 뿐 아니라, 장성하여 성결케 하여 그리스도께 마지막 날에 드리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가 세우고 목회한 교회의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우리 주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서” “소망이며, 기쁨이며, 자랑의 면류관이며 영광”이라고 (살전 2:19-20; 빌 4:1)라고 고백한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소망 위에 그는 각 교회에 대한 이 땅에서의 소망을 피력한다. 예를 들어, 고린도 교회가 당한 고난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자신이 고난 가운데 위로를 얻었던 것처럼 그들도 “고난에 참예한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알고 이러한 자신들의 소망이 더욱 견고하다고 전한다 (고후 1:7). 또한 고린도 교회에게 마게도니야의 교회들이 환난 가운데 드린 연보를 칭찬하면서 그들이 “우리가 바라던(소망하던)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다”(고후 8:5)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종말론적인 소망관이 각각의 교회에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소망함으로 이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3. 사역관: 종말론적 책임감과 확신

사도 바울은 각 개인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 (롬 14:10)이며 거기에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할 것(롬 14:12)을 믿었다. 여기에 각 개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져야 할 책임감(accountability)가 있다. 우리의 소망은 단지 현재의 고통을 무마시키는 데에서 그 역할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하여 어떠한 결정들을 내리고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임성 있는 존재로 서게 만든다.

사도 바울의 종말론적 책임감은 그로 하여금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사람을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쳐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는”(골 1:28) 자세를 갖게 만들었다. 그의 사역의 목표는 각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날까지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목표의식은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사람들을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자신 앞에 세우고자 하였던” 주님의 뜻에 연대되어 있음을 골로새서에서 사도 바울은 암시한다(골 1:22).

골로새서 1장 마지막에서 그가 고백한대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자신의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골 1:29)할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삶을 “선한 싸움”(고전 9:26; 빌 1:20 살전 2:2; 딤전 1:18; 6:12; 딤후 4:7)이나, 고통을 가져오는 “달음박질” (고전 9:24; 딤후 4:7; 비교: 행전 20:24)로 이해하고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사역을 끝까지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종말론적인 사역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많은 사역자들이 사도 바울의 정통성을 의심하고 비난하며 음해하고 몇몇 교회들이 부화뇌동할 때도 그를 흔들리지 않게 중심을 잡아 주었던 것도 이러한 종말론적인 자신감이었다. 사도 바울의 정통성을 의심하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너희가 의심하는) 우리도 다시 살리사 (우리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 안다”(고후 4:12)고 말하며,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심판을 받을 것을 상기시킨다 (고후 5:10). 바울이 수없이 흔들릴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정도를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이 돌보았던 교회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될 것을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철저히 종말론적 역사의식에 뿌리 내린 소망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현세적인 복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삶은 그가 속했던 시대와 상황, 개인적인 고통, 그리고 자신이 주님의 뜻을 좇아 살았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수많은 어려움과 환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좌절감에 빠졌던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절망에 굴복하게 하지 않았던 것은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심에 대한 소망’이었다. 그는 중심을 잃고 이리 저리 휩싸일 수 있는 수많은 순간이 있었지만, 그럴 때에 중심을 잡고 꾸준히 자신이 달려갈 길을 달려갈 수 있게 했던 것도, 언제인가 그가 섬긴 교회와 함께 하나님 앞에 설 것이라는 소망이었다. 그로 하여금 현실이 주는 달콤한 성공의 유혹을 과감히 뿌리치고 자신을 의롭다 여겨주신 주님의 복음에 자신을 투철하게 드릴 수 있게 하였던 것도 ‘복스러운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소망을 가져다 줄 것이 없다. 아마도, 진보가 있는 만큼, 진보의 그늘이 더욱 깊어질 것이다. 한국 사회의 50년 전이건, 지금이건 사람들은 여전히 좌절하고 절망한다. 어쩌면 이런 좌절과 절망의 현상은 2000년 전 사도바울의 삶에서나 우리의 삶에서나 매우 비슷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만약에, 우리도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그 철저하게 종말론적인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에 뿌리를 내린 “소망”을 가진다면,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절망에 무릎 꿇지 않고 우리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의 선한 싸움과 달려갈 길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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