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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신학 기고글] 한국 복음주의 교회의 근본적 필연적 사명-김형국 목사

작성자
하나복
작성일
2017-03-17 11:54
조회
1674

한국 복음주의 교회의 근본적 필연적 사명

김형국 목사 / 하나복 DNA 네트워크 대표 / 나들목교회 대표


도덕경의 첫 문장은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으로 시작한다. “도를 설명하여 도라고 하면, 이미 도가 아니고, 어떤 것에 이름을 붙여주면, 이미 그 이름이 아니다”는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본질을 단어로 규정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이미 동양 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로 불리는 오늘날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이런 풍토 속에서는 정확한 정의보다는 파토스적 상징이나 대중적 감성이 모든 소통과 논의를 주도한다. 실체를 분명히 구별할 수 없지만 말하는 사람마다 실체를 너무도 분명히 규명하고 있는‘좌파’와 ‘우파’가 좋은 예일 것이다. 입지점에 따라 상대적일 수 있는 개념이 절대적인 실체를 가진 것 같이 여겨지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회자되는‘복음주의’라는 단어도 이와 비슷하다. 사용하는 사람마다 입장이 다르다. 복음주의 또는 신복음주의를 자유주의에 결탁한 신학 사조 쯤으로 생각하는‘의식 있는’근본주의자를 제외하면, 한국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복음주의자로, 또 섬기는 교회를 복음주의 교회로 생각한다. 또한 진보적인 신학을 표방하는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교회는 보수주의, 복음주의, 근본주의 간의 큰 차이점을 감지하지 못하고 동의어로 취급한다.

이렇게 복음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한국 교회의 논의가 저마다 다르다보니, 복음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간의 논의와 연대는 혼란과 분열을 반복하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더군다나 현재 우리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의 진보 또는 성숙을 막는 집단으로 일반화되어 매도되고 비판받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복음주의의 역사적인 뿌리와 정체성을 살펴보아 본질적인 특성을 파악하고, 이에 따라 한국에서 복음주의 교회는 어떤 식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일은, 사회적 지탄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오늘의 한국 교회가 대면해야할 필수불가결한 책무가 아닐 수 없다.

복음주의의 특성과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

그 동안 복음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이 제안되었다. 복음주의에 대한 이해가 다양한 이유 중 하나는 복음주의라고 불리는 운동 또는 신학적 사조가 언제나 자기 나름의 다양한 시대적 환경에서 태동되었기 때문이다. 현대교회사만 보더라도, 영국에서 복음주의가 회자된 역사적 정황과 미국에서 복음주의가 태동된 정황은 매우 다르다. 또한 남미를 중심으로 하는‘소수파’복음주의는 신학적 내용에 있어서 영미를 중심으로 한 ‘주류적’복음주의와 공통분모가 있음에도 사회·역사적 정황상 강조점이 매우 다르다.

이런 면에서 한국의 복음주의는 더욱 정의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미국 신학과 교회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초기 한국 교회, 이후 복음주의적 선교 단체의 영향과 유럽과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70~80년대, 그리고 교회의 정치적 참여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 80년대 중반 이후의 운동 들이 섞여서 한국의 복음주의는 영미에서 보이는 혼란보다 더 많은 혼란을 양산하고 있다. 이런 다양성과 함께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보이는‘신학하기(doing theology)의 부재’는 한국 교회에서도 나타나 치열하고 적실한 신학적 논쟁을 아예 피하는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서는 복음주의 신학과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렇다면‘복음주의 교회’를 정의하기에 앞서 반드시 정의해야 할 ‘복음주의’를 어떻게 규정하고 논의를 전개해야 할까? 그동안 다양한 공통분모를 중심으로 복음주의 교회를 규정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고, 앞으로도 이런 논의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본고에서 복음주의가 가지는 중요한 두 요소인‘복음’과 ‘상황’을 복음주의의 특성으로 가름하려 한다. 즉 복음주의는 ‘변하지 않는 복음’을 자신이 발 딛고 살아가는‘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 어떻게 적응하려 하는가에서 나타났다.

가톨릭 교회의 권위 아래 복음이 빛을 잃은 종교개혁 당시에는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로 대체되기 전까지 프랑스어 ‘에방겔리크’와 독일어 ‘에판켈리쉬’라는 단어로 종교개혁 시대의 ‘복음주의’를 표현했다. 청교도 운동이나 경건주의 운동에서도 윤리적 삶의 현장과 개인적 체험이라는 장에서 복음을 살아내려 할 때, 복음주의적 특성이 나타나곤 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에서‘복음주의자’란 한국 사회의 사회·역사·정치·문화적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자신들이 믿는 복음을 살아낼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구체적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아내려고 하는 교회를 ‘복음주의 교회’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 점에서 한 가지 반드시 부가해야 할 설명이 있다. 복음을 이해하고 상황을 해석하는 기능인 이성 또는 합리적 사고의 위치다. 상황에 대한 이해와 해석 없이 성경만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성경이 애초에 그렇게 쓰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황에 대한 얕은 인식이라도 있어야 실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성경이나 상황에 접근할 때 이성과 합리성의 기능을 어느 정도 인정하느냐다.

계시와 이성의 오래된 논쟁도 이 주제에서 비껴나기 힘들다. 다르게 표현하면, 계시 이외에 다른 지식은 필요악은 아니어도 불필요하다고 믿는 분파가 근본주의라면, 계시의 빛 아래에서라면 성경을 해석할 때나 상황을 이해할 때 이성적이고 합리적 탐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파가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이 표현 역시 정확하지 않지만)는 이성과 합리적 탐구에 계시가 구속력이나 전제점을 제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파라고 할 수 있으니, 복음주의와 자유주의는 이 지점에서 분리된다. 근본주의가 계시에 갇혀 있고, 자유주의가 이성으로 무제한의 자유를 누린다면, 복음주의는 계시에 뿌리박고 상황 속에서 이성적 탐구를 지속하는 자세를 취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 복음주의 교회가 있는가? 지성의 순기능 자체를 무시하고, 인문사회과학이 됐든 자연과학이 됐든 지성적 탐구 자체를 폄하하는 복음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성경의 해석과 상황에 대한 이해를 통한 신학하기(doing theology)가 없다면 복음주의교회라고 부르기 힘들다. 이런 면에서, 통계적 조사는 없었으나, 한국에서는 복음주의 교회가 많지 않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 더 나아가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시도가 한국 교회에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80년대 정교 분리를 외치며 침묵하던 교회들과 교회 인사들이 최근에 정치적 발언과 행동을 하고, 대형 집회를 주도하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들에게도 상황에 대한 이해가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상황에 대한 이해와 이에 따른 실천이 있으니 이들도 복음주의자라고 불러야 하는가?

이성과 합리적 탐구의 특징은 토론과 소통이다. 그런데 토론과 소통이 부재한 상태, 다시 말해 지성은 있으나 균형을 잃은 지성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이와 관련하여 성경을 해석하여 행동한다면 이를 ‘복음주의적’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키기는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반도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즉 정치적 입장에 따라 복음주의가 양분되는 듯하다. 이는 사회 역사를 읽어내는 데 복음의 총체성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논의가 일천한 데서 기인하는 문제로 볼 수 있다. 현재 한국의 복음주의가 연대하지 못하고 다소 혼란과 무기력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가장 큰 원인은 신학적인 영역보다는 상황에 대한 상이한 해석에서 찾을 수 있다. 복음의 총체성을 이야기하지만 그 복음을 적용해야 할 상황에 대해 견해가 다를 뿐 아니라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서 양립할 수밖에 없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한국의 복음주의는 분열할 수밖에 없다. 복음주의는 늘 상황에 뿌리박고 복음을 꽃피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성경과 관련되어 믿는 바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을 보다 선명하게 하고, 나아가 한국 사회를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연구와 토론을 통해 상황에 대한 통합적 인식에 이르러야 한다.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발견할 수 있듯이 복음주의자와 그 교회는 계시에 신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정직하게 이성을 활용하여 성경과 상황을 이해·해석하고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내는 자들이며, 이런 가치가 구현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한국적 복음주의 교회의 근본적 사명(the essential mission)

그렇다면 한국적 복음주의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근본적인 사명(the essential mission)과 근본적 사명으로 말미암은 필연적 사명(the necessary mission)이 있다.

먼저, 근본적 사명은 복음을 말, 행위, 전인격적 삶을 통해 지켜내고 살아내는 사명을 뜻한다. 이것은 복음주의의 뿌리와 연관된다. 이를 위해서 첫 번째로, 복음주의 교회는 복음을 바로 이해해야 하는 본질적 사명을 갖는다. ‘복음’이 무엇이고, 복음이 어떻게 사람을 살리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필요하다. 복음이 증언하는 예수에 대한 이해와 그의 가르침에 대한 강조가 따라오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더 나아가 복음과 복음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유일한 증거를 담고 있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은 근본적인 사명이다.

그러나 복음이 가지는 단순성을 강조하다가 복음의 심오함과 총체성을 놓치는 것은 복음주의가 갖는 건강하고 순기능적 지성의 역할을 무시하는 것이며, 결국 이는 복음 자체의 적실성과 영향력을 감소시킨다. 복음을 우리의 상황에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시대의 언어와 사상으로 성경의 권위와 예수의 유일성과 구속적 사역의 의미와 예수께서 가르친 하나님 나라 사상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지난 이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예수를 이야기해왔지만,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를 이해하고, 그 예수가 전한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었음을 확신하고, 시대 상황 속에서 예수와 그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따르려했던 사람들이다. 예수와 복음에 대한 헌신은 앞서 간략히 논의한 상황에 대한 해석에 따라 다른 모양을 양산하기 때문에, 예수와 복음에 대한 이해 역시 상황을 떠날 수는 없다.

두 번째로 복음주의 교회는 복음과 예수를 전하는 본질적 사명을 갖는다.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한 이해와 문제 제기, 동료 시민과 이웃, 더 나아가 자연 생태계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갖고 있는 ‘자칭’복음주의자들이 더 이상 자신의 말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다. 비록 회심의 주체적 몫이 성령님께 있으나 이들과 이들의 교회에서 회심이 빈번하게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이들의 빈약한 시도나 무관심에 있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다. 오히려 복음이 자주 전해지고 회심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곳은 근본주의적 성향이 강한 교회고 개인이다.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 전도와 반지성적 태도가 거의 동일시되는 경험을 했다 할지라도 이제는 삶과 인격을 기반으로 하고, 과정 중심적이며, 총체적인 복음 전도를 발전시켜야 한다. 더 이상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잃어버린 양’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는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선언한 그들의 주인인 예수를 따르는 자들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뒤섞여 있는 상황 속에서 절대적이며 유일한 진리인 예수와 그의 복음을 어떻게 설명하고 살아내서 사람들이 회심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인가는 복음주의자와 복음주의 교회의 과제다. 우리 시대 사조 속에서 가장 적실한 전도 방법론을 찾아내려는 노력과 함께 예수와 그의 복음을 말과 삶으로 전하는 일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세 번째로 복음주의 교회는 복음이 만들어내는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본질적인 사명을 갖는다. 공동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부분이다. 복음을 통해 회심할 때 이 회심은 한 개인의 회심을 넘어 공동체로의 회심이다. 그래서 성경은 공동체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공동체는 부가적인 중요성 밖에는 갖지 못하는 것 같다. 개인주의가 가진 장점이 있긴 하지만 신앙의 양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그 원인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드러내는 기본단위로서 복음의 총체성을 이해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교회로 불리는 조직은 많이 있다. 문제는 교단의 전통과 현대 마케팅적 조직 원리에 따른 교회 조직은 있으나 복음이 만들어낸 공동체를 드러내는 교회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복음주의 교회는 그들이 믿는 바에 걸맞은 교회론을 신학적으로 정립할 뿐 아니라 실제로 공동체적 삶이 가능한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발전시켜나가야 할 근본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복음주의 교회는 성경의 권위 아래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어떻게 의사결정을 하는가에서 시작해 어떻게 갈등과 차이를 해소하며,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일치를 이룰 수 있는지, 어떻게 말과 혀로가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지를 드러내는 공동체를 만들어내야 한다. 특별히 공동체를 갈구하지만 물질주의와 개인주의의 결합으로 인해 공동체가 전반적으로 해체되는 상황에서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 보여주지 못한다면, 개개인이 믿고 전파하는 복음의 영향력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대안적 공동체를 형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음과 예수를 자신의 시대 상황 속에서 이해하고 따르며, 전인격적인 방법으로 전하고, 복음에 걸맞은 공동체를 이루는 이 본질적인 사명에 매진하고 있다면 그들을 복음주의자 또는 복음주의 교회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현재 모습 속에서 이런 복음주의자나 복음주의 교회를 찾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복음도, 예수도, 복음 전도도, 교회도 있으나 피상성과 신학의 부재, 그리고 상황에서 유리된 비실제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본질적 사명이 실행되지 않는다면 이들에게 복음이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모습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본질적 사명이라는 뿌리를 갖지 못하면 필연적 사명이라 할 수 있는 줄기는 메말라 가고 건강한 열매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교회의 필연적 사명(the necessary mission)

그렇다면 복음주의 교회의 필연적 사명은 무엇인가? 본질과 필연을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으나 본질적 사명에 충실할 때 나머지 사명은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 본질적 사명이 상황과 상관없이 견지되어야 할 사명이라면, 필연적 사명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면에서 본질적 사명과 구별된다.

복음주의 교회의 첫 번째 필연적 사명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교회의 성도들이 살아내도록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근본주의 교회가 성과 속, 교회와 세상을 나누는 이원론적 영성으로 성스러운 교회에서는 신앙생활을 하지만 속된 세상 속에서는 세상 방식으로 살거나 매우 소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묵인 내지 권장한다면, 복음주의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어떻게 자신들이 믿는 바를 살아낼 것인지를 격려하고 도전하고 후원한다.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상황과 유리된 성경 지식이 논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어떻게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에 녹여 낼 것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토론, 실험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별히 각 개인이 처한 상황, 즉 학교·가정·직장에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좋은 역할 모델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지성뿐 아니라 감성과 의지까지 포함한 전인격으로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예수를 따르는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복음주의 교회의 필연적인 사명이다.

총체적 복음을 세상 속에서 살아내기 위해서는 더욱 깊은 복음주의 영성이 필요하다. 복음주의의 미래에 영성 추구와 성숙은 필수 불가결하나 일반적으로 복음주의가 그에 걸맞은 영성을 계발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그러나 복음주의 교회가 지평을 넓혀서 교회사 속에서 이미 복음을 기반으로 영성 수련을 해왔던 전통에서 배우고, 20세기와 함께 시작되었던 오순절주의의 체험적 신앙을 비평적으로 수용 발전시킨다면 복음주의에 걸맞은 영성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복음과 그 영성에 기초하여 성도가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살아내게 하는 것은 복음주의 교회의 중차대한 사명이다.

두 번째로 복음주의 교회는 한국 상황에서 총체적 복음이 어떻게 총체적 선교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지 고민하여 대안을 만들고 실천해야 한다. 각 개인들이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총체성을 살아내도록 도울 뿐 아니라 교회가 우리 사회 속에서 공동체로서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여 대안을 창출해야 한다. 교회가 직면해야 할 다양한 영역을 파악하고, 각 영역에 대한 관심과 기도가 선행될 때 기초적인 교육과 학습이 가능하며, 이어서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실천을 넘어선 공동체적 실천이 뒤따라올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사회·문화·통일·생태적인 선교와 해외 선교가 분리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이와 같은 통합적 선교를 어떻게 가능하게 하며, 어떻게 한 공동체 안에서 협업과 분업을 할 것인지 가 구체화될 것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영역의 총체적 선교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초기 단계에서는 사회봉사(social service)가 주축을 이루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필연적으로 제도와 구조의 문제를 다룰 사회 활동(social action)이 더해질 것이다. 희생과 열정을 넘어서서 사회 전반을 이해하여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이를 사회 제도 속에 구현하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 그러나 이는 복음주의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다. 더군다나 한국 교회는, 당분간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게 될, 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보편적 틀 안에 한국 사회라는 특수성을 지닌 채 존재한다. 따라서 이 같은 복합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안을 찾는 것은 한국 복음주의 교회의 피할 수 없는 사명이다.

세 번째로, 이와 같은 사명에 충실하다 보면 ‘선한 일(good works)’을 위한 복음주의 교회의 연대가 필요하다. 이것은 교회가 정치 집단화 되는 것과는 다르다. 개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총체적 선교가 있지만 더 큰 단위, 더 넓은 차원에서 연대의 필요성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연대는 복음 전도로부터, 해외 선교, 때로 잘못된 공공 정책으로 인한 반정부 시위나 대안적 제도 입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복음주의 교회들은 교제(fellowship)의 차원을 넘고, 개교회주의와 각 교단의 배타성을 넘어 이슈에 대해 서로 협력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연대는 복음, 복음주의, 총체적 선교, 이슈 선정 등에 동의가 이루어질 때 가능한 것이어서 필요성은 크나 구체적인 방법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 교회가 건강한 교회론을 세워나간다면 복음주의 교회 간의 건강한 연대는 가능할 것이다. 특별히 근본주의적인 교회들, 사회의 지탄을 받는 교회들, 과잉 대표성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정치집단화한 기관들이 한국 교회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복음주의 교회들의 건강한 연대는 시대적 요청이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복음주의권을 넘어서 사안에 따라 다른 집단과 연대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현대사회는 다양한 집단이 모여서 이룬 사회고, 복음주의 교회는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 중 하나다. 따라서 유사한 입장과 동일한 목적을 가진 사안에 대해서 다양한 그룹들과 연대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이는 순기능적 지성과 총체적 복음을 믿는 복음주의 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사안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복음주의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훼손당하지 않는다면, 기독교 내의 다양한 그룹뿐 아니라 기독교를 넘어서 범종교적인 단체나 시민사회단체, 정부와의 연대도 필요하며 가능하다. 의제 설정과 우선순위 조정 등은 복음주의 교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연대가 모든 면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혈맹이 될 수는 없다. 이는 사안 자체가 전체 사회를 위한 전략적 제휴의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가 상황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위한 학습, 토론, 소통, 담론 형성의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에 섣부른 연대는 불필요한 대가를 지불할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종교와 신념의 자유가 헌법적 가치로 보장되는 사회의 책임성 있는 단위로서의 교회는 사회로부터 요구받는 역할이 있다. 따라서 복음이 가지는 총체성을 신실하게 지지하는 복음주의 교회는 그 대가를 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복음주의 한국 교회, 이제 시작이다!

최근 복음주의에 대한 논쟁이 가속화되고 있다. 꼭 필요한 일이다. 한국 사회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한국 교회의 현주소와 그 원인들을 생각해볼 때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다. 복음주의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느 시대로 국한하든 복음주의자란 자신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총체적 복음을 살아내려 애썼던 사람들을 지칭한다. 한국에 복음주의적 교회가 존재하는가는 복음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건강한, 적어도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싶은, 다음 세대가 닮고 싶은 복음주의 한국 교회가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이는 한국 교회가 불과 100여 년의 짧은 역사 속에서 급속도로 이룬 성장으로 말미암은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예수가 전해주신 복음이 있으며, 우리보다 조금 앞서 자신들의 토양에서 이 복음을 살아내기 위해서 애썼던 동시대의 복음주의 선배들이 영미는 물론 남미 등지에 존재한다. 세계 교회의 한 형제 교회로서 우리는 좋은 선배와 동료들을 전 세계에 가졌다. 뿐만 아니라 짧은 한국 교회 역사 속에서도 ‘변치 않는 복음’을 조선에서, 분단 현실 속에서, 산업화와 비민주적 사회 여건 속에서, 그리고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 속에서 살아내려고 애를 썼던 소수의 선배, 동료 성도들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복음에 경도되어 상황에 무지했고, 때로는 상황에 집중하여 복음을 희석시킨 불균형이 발견되지만, 이제는 좀 더 균형감 있게 복음을 상황 속에서 살아내는 복음주의자와 그 교회가 한국 교회 저변에서 드러나야 할 때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엄격한 의미의 복음주의 한국 교회는 이제 막 태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소 때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이것이 교회라는 살아 있는 유기체가 성장해 나가는 일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더욱이 씨를 뿌리는 자와 물을 주는 자들이 다 중요하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복음주의자들이라면 상황에 절망하거나 탓하지 않고, 자신의 상황 속에 다시금 씨를 뿌리고 물을 줄 것이다. 그것이 복음주의자, 복음주의 교회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1) 이와 관련한 개론적인 지식을 위해서는, 목창균,《현대 복음주의》(황금부엉이, 2005) 중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알리스터 맥그라스,《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한국장로교출판사, 1997) 중 ‘복음주의의 특징’, 존 스토트, 《복음주의의 기본진리》(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2)를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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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 신학 기고글] 바울이 절망에 무릎 꿇을 수 없었던 이유: “소망” – 김형국 목사
하나복 | 2017.03.31 | 추천 0 | 조회 1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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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 2003. 9] 절망하는 이와 함께 울어주어야! – 김형국 목사
하나복 | 2017.03.24 | 추천 0 | 조회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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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신학 기고글] 한국 복음주의 교회의 근본적 필연적 사명-김형국 목사
하나복 | 2017.03.17 | 추천 0 | 조회 1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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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신학 기고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신 교회 (엡2:1-22 주해와 적용) – 김형국목사
admin | 2017.01.17 | 추천 0 | 조회 3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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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네트워크

일산 지역의 개척교회 목회자 다섯 명이 속해있습니다. 매월 둘째주 월요일에 각 회원들의 사역지를 돌아가며 방문합니다. 모여서 제자훈련의 경험도 나누고, 사역의 어려움에 대해 조언을 하기도 하고, 산행으로 교제도 하는 즐거운 모임입니다.

모임 안내: 매월 둘째주 월요일 (별도 안내)
키맨: 유형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