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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신학 기고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신 교회 (엡2:1-22 주해와 적용) – 김형국목사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7-01-17 16:35
조회
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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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1-22절의 주해와 적용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신 교회

 

 

김형국 * 나들목 사랑의교회 대표목사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대학원에서 M. Div.와 신약신학(Ph.D.)을 전공했다.

지금은 나들목 사랑의교회의 대표목사이다.

 

들어가는 말

한국 교회가 정체되었다는 말이 나온 것은 벌써 오래된 이야기이고, 여러 통계수치가 이러한 교회의 쇠퇴를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양적 성장에 문제가 생긴 것 보다 더욱 걱정하게 하는 것은 교회의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다. 건강한 교회가 되지 못하는 사회학적이고, 역사적인 이유들이 있겠지만, 여러 가지 원인 중에 으뜸은 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건강한 교회론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건강하지 못한 교회관이 그릇된 목회철학과 방법론을 양산해내고,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은 중심을 잃은 방법론으로 ‘교회성장’을 이루려는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인 것 같다.

이런 면에서 에베소서는 한국 교회에 매우 중요한 서신이다.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 사상의 진수라거나 왕관으로 여겨지는데, 사도 바울의 신학 중 교회론이 탁월하게 정리되어 있다.[1] 특히 에베소서 2장과 4:1-16, 5:21-33에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사상이 집중적으로 드러난다. 2장이 사도 바울의 교회론에 있어서 성경적이고 영적인 기초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면, 4:1-16은 그 교회의 하나됨과 실제적인 적용점을 가르치며, 5:21-33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결혼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다. 에베소서 2장은 실제로 사도 바울의 인간론, 사단론, 신론, 구원론과 교회론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만드셨고, 그 교회는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에배소서 1장의 연장에서 읽는 2장과 그 구조

에베소서 2장을 이해하는데 1장과의 연관성은 매우 중요하다. 사도 바울은 1장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며 언급한 중요한 주제들을 2장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늘에(evn toi/j evpourani,oij) 속한 신령한 복’(1:3)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1:4)은 2:1-10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이루어져 ‘하늘에 앉게 된’ 일들을 통하여 상세히 설명된다. ‘하늘에 있는 것이 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신 것’(1:10)의 의미는 2:11-22에서 상세하게 설명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셔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앉히시고, 오는 세상에 뛰어나게 하신’(1:19-21) 능력은 신자들에게 어떻게 은혜로 임하는지는 2:1-10에 장엄하게 묘사된다. 그리고 ‘그가 만물을 복종하게 하며, 충만하게 하는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는 것의 의미는 2:11-22에서 우주적인 화해와 하나됨과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인 교회’라는 주제로 설명된다. 이렇게 1장에서 소개된 신비하고 모호하게 느껴지던 부분들이 2장에 이르러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에베소서 2장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 부분(2:1-10)에서 사도 바울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떻게 구원하였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어지는 부분(2:11-22)에서는, 전에는 ‘이방인,’ ‘무할례당,’ ‘외인,’ ‘소망도 하나님도 없던 자들’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져오신 평화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시민,’ ‘하나님의 가족,’ ‘성전,’ 그리고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었는지(11-22절)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2:1-10은 단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었는지, 또 그 구원의 성격이 어떤지를 설명해주는 것 이상으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신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2:1-10은 구원의 개인적인 측면에 대한 설명이고, 11-22은 교회론적인 측면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은 에베소서 1-2장의 흐름을 무시한 이해이다. 2장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어서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던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2:1-10) 어떠한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어떻게 세우셨는가(2:11-22)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2장 전체를 살펴볼 때, 지나치지 말아야 할 표현이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그때에-이제는 (pote, – nu/n)’의 구조이다.[2] 1-10절에서는 ‘그 때에’만 2회 (pote,, 2, 3절) 나타나고, ‘이제는’이라는 단어 자체는 나오지 않은다. 그러나, 4-10절의 내용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제” 우리가 누리고 있는 구원에 대한 설명이다. 11-22절에서는 ‘그때에-이제는’의 구조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11절의 ‘pote,’(그때에,)는 12절의 ‘tw/| kairw/| evkei,nw’ (개역 성경은 11절과 동일하게 ‘그때에’로 번역했다)로 변형되어 표현되고, 13절의 ‘이제는’ (nu/n)는 19절에서 ‘이제부터’ (ouvke,ti)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2장의 1-10절과 11-22절 각 부분에서 동일하게 강조되고 있는 것은 ‘그때에’ 어떠했던 너희가 ‘이제’ 어떻게 변하였는가 이다.

또 하나 주목하여야 할 표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evn Cristw/| VIhsou)라는 표현이다.[3] 이 표현은 1-10절에서는 별다른 변형없이 세번 (6, 7, 10절) 나타나고, 11-22절에서는 한번 (13절) 나타나지만, ‘자기 안에서’ (evn auvtw/|: 15, 16절[개역성경은 ‘십자가로’ 번역함]), ‘그 안에서’ (evn w-|: 21절, 22절[개역 성경은 ‘예수 안’에서로 번역]) 등으로 동일한 뜻을 가지고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11-22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와 동일한 의미라고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매우 유사한 표현들, 즉, ‘그리스도의 피로’ (evn tw/| ai[mati tou/ Cristou: 13절), ‘자기 육체로’ (evn th/| sarki. auvtou:15절, 원문에는 14절),[4] ‘십자가로’ (dia. tou/ staurou: 16절), ‘저로 말미암아’ (diV auvtou/: 18절) 등의 표현들이 나타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와 유사 표현들이 ‘그때에-이제는’ 구조와 함께 나타나는 것을 주목하라! 이 모든 표현들은 ‘이제는’에 해당하는 부분에만 나타난다. 이러한 구조를 통하여,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이 전에’ ‘그리스도 밖’ (cwri.j Cristou: 12절)에 있을 때에 영적으로 어떠한 형편(1-3절)이었는지, 하나님의 특권을 누리던 이스라엘에 비교할 때 어떠한 상태(11-12절)였는지를 기억하게(생각하라, 12절)하고, 그와 대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얼마나 놀라운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4-10절), 그리고 공동체적 (13-22절)으로 드러났는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구원 (1-10절)

1-10절을 일견 보기에는 1:23과 관련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앞서서 살펴보았듯이, 2장은 1장의 흐름을 받아 읽어야 한다. 1장 말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다가, 그 능력이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고, 또 높이셔서 교회의 머리를 삼으셨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이의 충만이라고 한다. 1:23의 놀라운 선언을 한 사도 바울은 2:1의 첫 단어인 kai.를(개역이나, 표준새변역에는 번역되지 않았다) 통해 강한 전환의 의미를 담고, 바로 전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충만과는 거리가 먼, 허무한 가운데 굴복하던(롬 8:20), 구원받기 전의 상태를 1-3절에서 설명한다. 이어지는 4-7절에서는, 이러한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 설명한다. 그리고는 8-10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이 구원의 성격을 다시금 설명해주고 있다.

 

  1. 구원 받기 전의 상태 (1-3절)

1-3절은 구원 받기 전의 사람들의 상태를 간결하면서도 분석적으로 설명해준다. 그 영적 상태는 ‘죽었다’는 것이다. ‘허물과 죄’는 인간이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과 하나님의 피조 세계 가운데서 몰아내고 자신이 중심이 되어 초래한 결과이다. ‘허물과 죄’에 매여있는 사람은 이미 그 결과인 죽음에 속한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예, 요 3:16-18; 5:24). 사도 바울이 롬 6:23에서는 죄의 결과가 사망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면, 본문에서는 죄로 말미암은 현재의 상태에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상태를 사도 바울은 2-3절에서 세가지 다른 영역, 즉 세상과의 관계, 영적인 세계, 그리고 사람들의 삶 속에서의 경험으로 나누어 상세하게 설명한다. 하나님을 거부한 사람들은 스스로 주인이 되었지만, 정작 인간은 스스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풍속’과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른다. 이렇게 외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받는 것 뿐아니라, 내적으로는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따라 행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신분은 하나님 앞에서 ‘진노의 자녀’이었던 것이다.

 

  1. 구원-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4-7절)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그의 ‘긍휼하심’과 ‘풍성하신 사랑’ 때문에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 (4절).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갑자기 ‘너희’에서 ‘우리’로 주어를 바꾸어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상태와,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를 대조하고 있다. 이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높임을 받으셨을 때 (1:20-22),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다. 특별히 1:20에서 예수님께 사용되어졌던, 일으키다(evgei,raj)와 앉히시다(kaqi,saj)는 동사를 사도 바울은 “-와 함께”라는 sun-복합동사인 함께 일으키셨고(sunh,geiren) 함께 앉히셨다 (suneka,qisen)는 동사로 바꾸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신 부활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에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보여준다.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사’ ‘함께 앉히셨다’는 표현은 이미 이루어진 일 사실을 드러내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간결하면서도 반복적이 이 표현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5]

이것은 일부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구원이 완전히 성취되었을 뿐 아니라, 성도들이 이미 하늘에서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는 열쇠는 5절의 ‘그리스도와’ (tw/| Cristw/|)와 6절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evn Cristw/| VIhsou/)이다. 즉, 이러한 놀라운 일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한 사람들에게 이루어진 영적인 실재(spiritual reality)인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실재는 구원의 확실함으로 인해서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하여 죄에 거하자’는 로마서에서 다루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가 있다 (롬 6). 그러나 엡 4:20-5:15과 6:10-18의 내용은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 빛을 던져준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그에게 속함으로 얻어진 구원은 확실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완성하실 종말에 나타날 구원을 기다리면서 삶을 살아야 (‘행하게’ 2:10)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과 ‘큰 사랑’ (4절)으로 시작되었고, 그의 ‘풍성하신 은혜’(8절)를 영원토록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1.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성격 (8-10절)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성격을 8-10절에서 다시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은혜의 역할 (8절),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행위의 관계(9절), 그리고 이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 (10절)이 무엇인지를 밝혀주고 있다.

먼저, 바울은 이미 5절에서 삽입의 형태를 취하면서 선언하였던 사실인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음’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8절에서는 ‘믿음으로’(dia. pi,stewj)라는 조건을 붙인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지만, 이것이 우리의 것으로 되는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할 때이다.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라는 표현에서 ‘이것이’는 문법적으로 구원이지 믿음이나 은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이고, 믿음은 그 주시는 선물, 즉 하나님이 하신 일을 단지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행위나 행함은 아무 역할을 할 것이 없다(9절). 단지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의 행위로 볼 수 없는 것이다. 10절에 이르러서 사도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만드신 바’ (auvtou/ … poi,hma ktisqe,ntej evn Cristw/| VIhsou/)라고 말한다 (개역 성경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라고 번역하여서, 오해의 소지를 남기고 있다. ‘선한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만드신 바’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 고린도 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사상을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참조, 고후 3-5장, 특히 5:17), 이 본문에서는 새로운 피조물의 목적에 더욱 무게가 실려있다. 그것은 ‘선한 일’인데,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는 것이다. ‘행하게’(peripate,w)라는 표현은 “살아간다”(표준새번역)는 의미인데, 이 단어가 2:2에는 ‘그 때에’ (pote,)와 함께 이미 사용되어졌다는 것은 큰 대조가 된다. ‘그 때에 그(허물과 죄) 가운데서 행하였던’ 자들이 이제 ‘선한 일 가운데서 행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것이다.

 

  1. 엡 2:1-10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 주는 적용점

엡 2:1-10은 건강한 교회의 출발점에 대하여 중요한 교훈을 준다. 건강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첫번째 요소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신 일’인 구원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교회가 많이 있어서 어떻게 윤리적으로 교회를 바로잡을까 하는 문제가 마치 건강한 교회가 다루어야 할 주제인듯한 분위기가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절망적인 상태와 그러한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 구원의 감격이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의 인격적인 반응이 있다. 교회의 근원적인 출발점은 구원의 감격에 있다.

이와 함께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때에’ 허물과 죄 가운데서 행하던 자들이 이제는 ‘선한 일 가운데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만드신 바’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답게 ‘선한 일’을 추구하고 그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구원의 확신(또는 깨달음)은 단지 신앙의 출발점인데,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이제 천당티켓을 확보했으니 세상 속에서 적당히 살아도 된다는 식의 믿음이 있다. 이것은 ‘그 때에’ 우리가 추구하고 살아서 우리가 죽은 상태로 만들던 것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며, 또한 구원이 궁극적인 목적인 선한 일을 추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확실성만을 너무 강조함으로써, 그 구원이 삶의 다양한 영역 속에 어떻게 “선하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간과하였다. 강단에서 구원의 확실성으로 성도들을 위로하는 설교도 필요하겠지만, 과거의 죄와 허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경고와 경계의 설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놀라운 구원을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내게 할 것인가 하는 실제적인 설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본문이 한국 교회에 주는 또 하나 지나칠 수 없는 시사점은 ‘믿음’이 무엇인가 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언제부터였는지 ‘자기가 믿고 싶은 것,’ ‘자신에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인 것처럼 가르쳐왔다. 본문은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신 일에 대한 전인젹적인 반응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경적인 믿음은 내가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에게로부터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신 일과, 앞으로 이루시겠다고 성경에 약속하신 일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조작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전인격적으로 수납하는 것이다.

2:1-10은 구원의 개인적인 측면만을 강조하며 성경을 읽고 가르쳐왔던 한국 교회를 도전한다.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일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러한 일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일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각 개인이 구원을 받는 것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인 교회의 출발점인 것이다. 즉, 각 개인의 구원과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의 편입은 둘로 나뉘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이 내용이 2:11-22에서 더욱 자세히 다루어지겠지만, 이 본문만으로도 구원의 공동체성이 충분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얻은 구원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것이고, 그렇기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은 이미 공동체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주의 신앙으로 변질된 한국 교회는 공동체적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이제, 그 공동체적 신앙의 측면을 11-22에서 더욱 자세히 살펴보자.

 

그리스도가 가져오신 평화와 그 결과로서의 교회 (11-22절)

2:1-10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일들을 설명하였다면, 2:11-22에서는 그리스도의 화목하게 하는 사역의 결과가 구체적으로 공동체에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에베소서를 바울 신학의 정수라고 한다면, 2:11-22을 에베소서의 정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사역의 구체적인 결과를 심오하고도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미 살펴 보았던 ‘그 때에-이제는’의 선명한 구조를 통하여, 사도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었던 특권들과 관련하여 ‘그 때에’ 그들이 얼마나 특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었는지를 설명한다(11-12절). 그리고 나서 ‘이제는’ 이러한 분열과 분리를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화목하게 하였는지(13-18절)를 설명한다. 이렇게 화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창조적인 능력은 교회를 만들어낸다(19-22절). 사도바울은 이를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 ‘하나님의 권속,’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하는 건물,’ ‘주님 안에서의 성전,’ 그리고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차례대로 설명을 한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하여, ‘가까워지다’ (13절) ‘평화’ (4회: 개역 성경에는 ‘화평’ [14-15절, 2회], ‘평안’[17절, 2회]으로 번역), ‘하나를 만드사’(14절) ‘한 새 사람을 지어’ (15절) ‘하나님께 화목하게’ (16절)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구원의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관계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런 평화의 관점에서 본다면, 11-15절까지는 사람들간의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의 평화를, 16-22절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의 평화를 묘사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1.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의 이방인의 모습 (11-12)

   사도 바울은 1-3절에서 구원받기 전의 상태를 설명하듯이, 11-12절에서도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그 때에’)의 이방인의 모습을 상기시켜준다 (‘mnhmoneu,ete’는 ‘생각하라’[개역] 보다는 ‘기억하라’의 뜻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겠다). 그 때,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였던 그들은 이방인이었고, 무할례당이었다. 사도 바울은 ‘칭하다’는 단어를 할례당과 무할례당 앞에 각각 반복함으로써, 할례가 단지 ‘손으로 육체에 행한’ 것으로 매우 피상적인 구별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11절).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믿기 전의 이방인들의 상태를 상기시킨다 (11절의 mnhmoneu,ete가 12절 초두의 o[ti와 연결되는 것을 간과하지 말라). 그 때에 그들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다. 태생적으로 그들은 이방인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약속의 언약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영적으로는, 세상적인 소망들은 많았을지는 모르지만, 참소망은 없었으며, 세상에서 여러 신들을 섬겼을지 모르지만, 참 하나님은 없는 자들이었다 (12절). 이러한 과거의 상태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그들이 과거에 얼마나 특권을 누리지 못하였는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 설명할 현재 가지고 있는 놀라운 축복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1. 그리스도가 가져오신 평화 (13-18절)

   13절은 대반전을 그 초두에 예고한다.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nuni. de. evn Cristw/| VIhsou/: 원문에는 ‘이제는’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가 문장의 초두에 등장하는 것을 주목하라)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선포한다. 사도 바울은 ‘가까워졌다’의 의미를 다음에 따라오는 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먼저 이방인인 그들이 이스라엘과 가까워졌고(14-15절), 그들은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되어 하나님과 가까와졌다(16-18절). 이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평화를 다루는 14-18절은 사도 바울의 평화의 복음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평화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래서 14절 초두는 ‘그가 우리의 평화이시다’로 시작된다.

   사도 바울은 14-15절에서 예수께서 어떤 상태에 있던 이방인과 유대인을 어떤 방법과 어떤 목적으로 평화하게 하시는 지를 설명한다. 인류를 둘로 나누어 놓았던 ‘중간에 막힌 담’과 ‘원수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떠한 상태였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원문의 문법적 구조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담’과 ‘원수된 것’ ‘율법’이 어떤 관계인지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문론적 관계가 어떠하든지, 율법으로 규정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과 이로 말미암은 적대감(‘원수된 것’)이, 예수님께서 율법을 ‘자기의 육체로’ 폐기하시는 방법을 통하여 무너지게 되었다고 사도 바울은 선언한다.[6] 이렇게 하신 목적은 ‘둘이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닌 ‘한 새 사람’ (e[na kaino.n a;nqrwpon)을 만드셔서 더 이상의 구별과 차별이 없게 하신 것이다.

16절에는 방향을 바꾸어 수직적인 목적과 그 방법을 서술하고 있는데, ‘그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 둘을 ‘한 몸’(e`ni. sw,mati)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15-16절에서 수평적인 관계와 수직적인 관계를 각각 반복되어 표현된 ‘원수된 것’(th.n e;cqran)으로 나타냈다면, 이 깨어진 관계가 각각 ‘자기의 육체로’(15절) 또한 ‘십자가로’(16절) 화목하게 된 것을 강조하고 있다. 17절에서는 이사야서 57:19을 인용하여 ‘먼데 있는 너희’와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화가 전하여졌다고 한다. 여기에서의 평화는 수직적인 평화를 뜻한다. 14-15절에서 수평적인 관계에 있어서 원수되었던 자들이 평화하게 하셨다면, 이제 16-17절에서는 수직적인 관계에서 원수되었던 관계를 평화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평화이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다시 요약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방인과 유대인, 우리 모두가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교회는 예수님이 가져오신 평화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는 새로운 존재, ‘한 새 사람’ (15절)과 ‘한 몸’ (16절)이었다.

 

  1. 그리스도가 가져오신 평화의 결과로서의 교회 (19-22절)

교회에 대한 간접적인 상징이 15-18절에서 ‘한 새사람’과 ‘한 몸’으로 나타나지만, 19-22절에서는 ‘외인’과 ‘손’이었던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하신 놀라운 일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먼저 그들은 이제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그들이 누리지 못했던 모든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놀라운 개념을 소개한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권속’이 된 것이다. ‘원수된 것’으로 상징되던 관계가 평화의 관계를 넘어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은 하나님의 가족의 성원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권속’ (oivkei/oi tou/ qeou/)이라는 표현 자체는 신약 성경에서 이 본문에서만 발견되지만, 이 표현과 관련된 수많은 표현(아버지, 아들, 양자됨, 형제, 등등) 이 신약성경 전체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교회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비유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7]

20-2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미지를 약간 전환하여서 건물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다.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며 ‘하나님의 권속’은, 든든한 기초 위에서 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기초의 중심은 모퉁이 돌 되신 그리스도이시며,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이 기초를 세우는 역할을 하였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원문에는(tw/n avposto,lwn kai. profhtw/n) 한 관사에 의하여 쓰여졌기 때문에 ‘사도들 즉 선지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좋고 그 뜻은 선지자 역할을 한 사도들이다.[8] 20절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다시 한번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진리를 증거하고 해석한 사도들의 전통 위에 세워졌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21절과 22절 모두 원문에서는 ‘그 안에서’(evn w-)로 시작하여서, 모퉁이 돌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 건물이 ‘서로 연결되고’(21절), ‘함께 지어져’(22절) 가고 있음을 강조해준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도달점(eivj)은 ‘주 안에서 성전’ (21절)이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22절)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처소가 된다는 사상은 예수님의 가르침 (요 2:19)과 사도 바울 자신 (고전 3:16-17; 고후 6:16-17)과 사도 베드로 (벧전 2:4-10), 그리고 사도 요한 (계 21:1-4)이 공유하고 있었던 신학이었다.

사도 바울은 이 건물의 기초이며 서로 연결되게 하며 함께 지어져 가게 하는 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과 함께, 이러한 과정이 하나님에 의하여 현재 진행되고 있음(현재 수동형 동사들)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이렇게 진행되고 있는 일에, 성도들 즉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어진 모든 이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음을 ‘-와 함께’라는 sun-복합동사를(21절:sunarmologoume,nh, 22절: sunarmologoume,nh을) 사용함으로써 보여주고 있다. 비슷한 표현으로 5-6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을 강조했다면, 21-22에서는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 간에 연합된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십자가와 육체, 즉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이루신 일은 단지 개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평화이며, 이 평화는 하나님께로의 평화로 이어진다. 이 평화는 개념적인 것이 아니어서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에 “가족됨”으로 “함께 자라감”으로 드러난다.

 

  1. 엡 2:11-22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 주는 적용점

사도 바울이 엡 2:11-22에서 가르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복음은 오늘날 한국 교회가 들어야 할 중요한 메시지이다. 본문은 물론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담과, 그들간의 적대감에 집중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그 적용점은 광범위하다. 갈 3:28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유대인이다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선언하였다. 갈 3:28에서 인종적, 사회적, 성적 차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떻게 없어졌는지를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갈 3:27), 그리스도께 속함으로 (갈 3:29) 이루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면, 본문은 그 중 한 주제인 유대인과 헬라인(이방인)간의 차별이 어떻게 허물어졌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방법으로 사회적, 성적인, 그리고 어떠한 차별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무신다고 가르친다. 한국 교회 내에 있는 지방색, 사회적 계층의 차이, 학력의 구별, 남녀차별의 문제, 그리고 목회자와 평신도의 차별이 이 본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십자가로 이루신 일은 이러한 모든 차별과 적대감을 부수시고 평화를 이루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진정으로 믿고 전파하며, 살아내는 사람들이라면, 그러한 교회라면, 한국 교회 내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이러한 차별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앞에서 되돌아 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평화를 오히려 ‘그 때의 상태’로 되돌리는 모든 행위는 사랑과 은혜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정면 도전이며 부인인 것이다. 실제로 본문은 수평적인 관계의 회복이 수직적인 관계의 회복의 전제점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수평적인 관계의 회복이 이루어져, 수직적인 관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을 가볍게 지나칠 수는 없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마 5:23-24)이 이 본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본문의 구원의 공동체성에 대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평화는 성도와 동일한 시민으로 표현되어서 모든 특권을 함께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이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선언한다. 한국 교회가 과연 이러한 가족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질문해 보아야 할 대목이다. “한 아버지”에게 “입양”되어서 서로가 형제가 된 “하나님의 가족”의 모습을 한국 교회가 추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많은 사람이 모일수록 좋은 “주일에 예배하는 집단”을 추구하고 있는가? 도시 상황 속에서, 수백, 수천,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가 나쁠 것이 하나도 없지만, 만약에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모습을 상실한 채, 주일 예배에 모이는 사람들의 크기에 감격하고 있다면, 과연 그 모습이 예수님이 이루신 평화와 가족적인 사랑을 드러내는 건강한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

더욱이, 본문은 이러한 교회가 지금 현재 진행중임을 강조하고 있다. ‘서로 연결하여’ ‘함께 지어져’ 가는 공동체이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교회 조직의 확장과 조직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들 간의 관계이다. 본문은 서로의 삶을 통하여 엮여져서 함께 성장하고 있는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본문을 신약성경에서 실제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 ‘우주적인 교회’를 설명하는 것이어서, ‘지역 교회’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핑계하는 것이 과연 실제적인 평화와 실제적인 하나님의 가족을 만드신 예수님 앞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지 심각하게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다.[9] 본문이 지어져감, 현재적인 진행을 강조하고 있고, 수동형, 즉 하나님이 그렇게 하고 계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라. 교회는 완벽해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을 이루어나가고 계시는 것을 경험하고 드러내는 그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공동체인 교회를 회복하는 일의 비밀을 한국 교회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분 안에서 그 분과의 놀라운 연합이 이루어졌고, ‘예수님의 피’와, ‘그의 육체’와 ‘그의 십자가’로 적대적인 담이 무너뜨려져 평화가 이루어졌고, ‘그 분’을 기초로 하여 교회가 세워지며, ‘그 안에서’ 교회는 자라간다. 건강한 교회의 비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신 것이다.

 

맺는 말

건강하지 못한 한국 교회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고, 혹시 기독교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했던 많은 사람들이 아예 삶의 대안으로서 기독교를 고려조차 하지 않는 상황이 오늘날 우리의 마음 아프게 한다. 이렇게 겉으로는 번영하는 듯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쇠퇴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고질적인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다. 각 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그 충만하심을 경험하게 되며(1-10절), 그들이 하나가 되어 공동체적으로 함께 성장하고 자라가면서 그 충만하심을 공동체적으로 경험하게 된다(11-22절). 우리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교회에 적용한다면(이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면서 가지셨던 계획과 바울이 꿈꾸었던 이상이 우리 한국 교회 속에 다시금 드러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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