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복 서평

시민의 교양, 채사장

작성자
하나복
작성일
2017-09-11 13:30
조회
244

풍삶초나 풍삶기를 인도하고 나면 "와~ 신기하네요. 기존에 알던건데 비로소 정리가 되네요. 머릿속에 있던 개념들이 기준을 잡고 줄을 좍 서는 느낌입니다!!" 라는 피드백을 자주 듣는다. 채사장의 책을 읽고 나서 풍삶기를 한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가 일상에서 이미 사용하던 용어와 개념들이 특정 관점을 기준으로 열과 오를 맞춰 선다. 그리고 채사장 (본명 : 채성호, 이하 책의 저자 표기를 따라 채사장으로 통일)의 기준으로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책을 읽으며 새로운 지식을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의 백미는 기존의 지식들을 구조화 하여 단순한 세계관으로 정리했다는 점이다. 시장의 자유와 정부의 개입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세금, 국가, 자유, 직업, 교육, 미래'라는 여섯 가지 범주가 두 갈래로 확 나뉜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에 따라 우리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지나칠 정도로 쉽게 설명한다. 그러한 선택의 주체는 '시민'이며 각기 다른 선택을 하는 시민들이 얽히고 섥혀 사회 현상들이 발생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우선 이 책을 읽기 전 독자는 두 가지 불편함을 넘어야 한다.

첫째는 채사장이 제시하는 극단적으로 단순한 세계관이다.

저자는 '자유'와 '국가의 개입'이라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 우리 사회를 본다. 이것으로 충분한가? 충분하지 못하다. 실제로 이러한 단순함 때문에 이 가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들을 남겨두고 말았다. 예를 들면 남북관계, 종교, 예술 등의 카테고리는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침에도 불구하고 일언반구도 없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경제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전략적인 선택으로 봐야 한다. 우선은 이 전략을 양해하고 채사장식 안경을 써본다면 그럴듯한 세상을 볼 수 있다. 그 안경은 써 볼만한 렌즈다. 초점이 안맞으면 그때 벗어도 되니까..

둘째는, '그리스도인이 왜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사회를 봐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교회는 사회의 일부다. 싫든 좋든 교회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 어디즘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사회가 불안하면 교회도 불안하고, 사회가 평안하면 교회도 사역에 전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심리적이고 개인적인 평화가 교회가 던지는 메시지의 전부일 수는 없다. 교회가 속한 사회의 객관적 토대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도록 자극할 수 있어야 한다. 예레미야는 남유다, 앗수르, 바벨론, 이집트를 둘러싼 국제적 긴장관계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메세지를 받고 피를 토하지 않았는가? 우리의 메세지는 시대적 고민을 담아내고 있을까? 시대와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며 민중들을 끌어 안을 수는 없는가? 시대적 고민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성경만 이야기 한채 사회적 격변에 거리를 두는 것으로 우리의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만약 한번이라도 이러한 고민을 한 사역자라면 이 책이 그렇게 불편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이 두 가지 불편함을 양해해준 독자는 다음 세 가지 열매를 수확 할 수 있다. 또한 부분적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기독교 세계관과의 교집합도 덤으로 찾을 수 있다.

첫째, 갈등론적 시각에서 사회를 볼 수 있게 된다. 우리 사회는 다양한 이익집단으로 구성될 수 밖에 없고 각 계층의 이해는 상호 충돌과 공존을 반복한다. 이러한 순환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채사장은 갈등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우리는 갈등은 나쁘고 화합은 좋다는 교육을 받아 왔다. 이것은 독재자의 논리다. 부부 사이에도 갈등이 있는데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이 의견일치만 보일 수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갈등을 조정하고 일치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을 잘 관리하는데 있다. 갈등은 상호 존중하고 대화할 줄 아는 성숙한 사회로 들어가는 문이다. 바울 서신 13권에 갈등 없는 교회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교회들을 동경한다. 갈등 너머에 있는 성숙의 열매를 알기 때문이다. 고용주와 피고용인, 목사와 교인, 이웃과 이웃, 교회와 교회가 겪는 갈등은 물론 힘들다. 하지만 힘들다고 나쁜 것이 아니다.

둘째, 역사를 진보적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저자는 '자유' 챕터에서 역사의 진보를 자유의 확장으로 본다. 개개인이 형식적으로나마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살고 있는 현대의 모습을 역사진보의 결과로 보며 향후 역사는 계속해서 진보하리라 예측한다. 그 자유 확대의 수혜자가 우리 같은 시민이다. 하나님 나라는 염세적 세계관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열심히 사역하면 이 세상이 낙원으로 바뀐다는 후천년적 세계관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겨자씨 처럼 번식하는 것을 소망하는 진보적 세계관이다. 그렇기에 이 세상을 썩어질 것으로 보지 않고 소망의 대상으로 본다. 우리 같은 겨자씨 한 알 때문에 어제 보다 오늘이,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좋아질 거라는 소망 없이 어떻게 이 길을 완주할 수 있겠는가?

셋째, 사회를 구조적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사회구조론을 전제로 한다. '교육'챕터에서 이 관점은 두드러 진다. 무엇이 진정한 교육인가? 본서에 따르면 교육은 경쟁이라는 사회 구조의 부산물이다. 사회 구조 자체가 양질의 일자리가 제한 되어 있다보니 상위 1.5%의 대학에 진학하든지, 그것이 안되면 8% in seoul에 들어가기 위해 교육에 매진할 수 밖에 없다는 구조적 분석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우리 민족이 공부를 좋아해서 학구열이 높은게 아니다. 이는 민족성 문제가 아닌 구조의 문제다. 우리가 이를 충분히 인지한다면 개인이 책임져야할 영역과 공동체가 책임을 공유해야 할 부분이 보다 더 분명해 진다. 청년 실업? 기도를 안해서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경제불황의 그늘 일 수도 있다. 노숙자? 게을러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회적 안전망이 부실해서 그럴 수도 있다. 모든 개인은 저마다의 결핍이 있다. 그 목마름이 개인의 책임만이 아니라는 점을 진지하게 인정한다면 우리는 더 공동체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고민하지 않을까? 손 내미는 것이 호의가 아닌 의무임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목마른 이웃에게 물 한잔 주는 것이 곧 예수님을 대접한 것임을 고백하게 되지 않을까? (마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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